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앙투아네트 (문단 편집) === 자녀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ie_Antoinette_and_her_Children_by_%C3%89lisabeth_Vig%C3%A9e-Lebrun.jpg|width=100%]]}}} || 이 초상화는 당대의 유명 여성 화가이자 '''앙투아네트의 화가'''라 불린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룬의 작품으로,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처형되기 2년 전인 1791년의 작품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자 그려진 집단 초상화이나 당시 연속된 [[프랑스 혁명|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왕비의 표정은 수심으로 가득 차 있다. 장남 루이 조제프가 가리키고 있는 요람은 차녀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의 것으로, 여기에 누워 있던 소피가 죽었기 때문에 검은 천이 둘러져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엔 차녀가 그려져 있었으나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최종본에서는 지운 것이다. *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1778년]] ~ [[1851년]]. 마담 루아얄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여담으로 프랑스 왕실은 [[왕비]]의 [[출산]] 시에 아무나 공공연하게 입회하도록 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이는 아이를 바꿔치기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물론 왕족의 [[출산]]인 만큼 완전히 '아무나'는 아니고 왕실의 계서제에 따라 입회 권한이 정해져 있었다. 옷을 입을 때도 이러한 계서제에 따라 하녀는 [[왕비]]에게 옷을 바로 줄 수 없었고 의전을 맡은 백작부인에게 건넨 뒤 왕비에게 가야 했다. 도중에 그 백작부인보다 더 높은 사람이 들어오면 다시 또 옷을 건네는 식이다. 이렇게 옷이 건네지는 동안 속옷 차림으로 있어야 했기 때문에 앙투아네트는 이를 무척 괴로워했다.] 이때 창문을 모조리 닫아서 환기도 안 되는 방에 너무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거의 질식해서 죽을 뻔 했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안전을 고려하여 이후의 출산은 허가받은 소수만 참관할 수 있도록 관행을 바꾸었다.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이의 성별을 듣고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 울음을 터뜨렸지만, 훗날 그녀의 [[시녀]] 마담 쵸팡의 회고록에 쓰일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 >"불쌍한 어린 것, 너는 그들이 바라던 아이는 아니야. 거짓말을 일삼는다 할지라도 현실을 속일 수는 없어. 특히 눈모양을 보기만해도 단번에 들통이나지.그렇다고 우리에게 소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야. 아들이였다면 국가의 아들이 되었겠지만, 너는 나의 것이야. 너는 내 모든 보살핌을 받게 될 거고, 내게 기쁨을 주고 슬픔을 나누게 될 거야." [[의사]]가 산후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많은 출혈을 했고, 그래서 딸을 낳은 후 기절했다. 그리고 2주 만에 포기하고 [[유모]]에게 보내야 했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첫 출산을 하고 1년 만에 [[임신]]을 하나, 임신 초기에 마차 문을 닫다가 문을 배에 부딪히는 바람에 [[유산(의학)|유산]]한다.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배려해 이 일을 함구했다고 전해진다. 이 내용들은 기록이 있어서 그런지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와 관련된 매체에서는 매우 자주 [[출산씬|묘사]]된다. * 장남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 [[1781년]] ~ [[1789년]]. 왕위계승권자로 도팽에 책봉됐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척추[[결핵]](척추카리에스)으로 죽었다. 위의 그림에서는 건강히 서 있는 모습으로 나오지만, 사실 저 그림을 그릴 때는 이미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병세가 심했다고 한다. * 차남 '''[[루이 17세|루이 샤를]]''' [[1785년]] ~ [[1795년]]. * 차녀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1786년]] ~ [[1787년]]. 11개월 만에 숨져 영아기를 넘기지 못했다. 그 외에 남편과 함께 아이를 4명 [[입양]]했다. 이 아이들은 입양된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 아르망(Armand) 혹은 자크(Jacques)라 불린 고아 프랑수아미셸 가녜(Francois-Michel Gagné)(1771~1792, 1776년 입양): 루이 16세 부부가 아이를 갖지 못할 때 입양했다. 이 인연으로 그의 형제자매들도 경제적인 지원과 교육 기회를 얻어, 형 드니는 궁정 첼리스트가 되며, 누이 2명도 꽤 많은 돈을 얻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수술을 통해 생식기능을 회복한 뒤로는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찬밥신세가 되었고, 이후 [[프랑스 혁명]]이 터지면서 [[공화주의]]의 지지자가 되어 양부모를 맹비난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1792년 [[벨기에]]의 주마프 전투에서 전사했다. * [[세네갈]]인 장 아밀카르(Jean Amilcar)(1787년 입양): [[세네갈]] 총독 슈발리에 드 부플레르(Chevalier de Boufflers)[* 참고로 성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와 방돔의 선배 장군인 루이 드 부플레르 장군(1644-1711)과 같은 가문이다. 여담이지만 이 장군은 빌라르와 방돔에 가려진 능력자로 릴 공성전에서 패했지만 동맹군의 피해를 최대화해서 오죽하면 동맹군 앞에서 항복 조건을 직접 말했고 [[말플라케 전투]]에서는 65세의 고령에도 자기보다 어린 빌라르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빌라르의 부상 이후 기병대를 지휘했다.]에 의해 국왕 부부에게 바쳐져 [[세례성사]]를 받아 이름을 얻었다. 궁전에서 도망친 국왕 부부에 의해 생 클로드의 [[고아원]]에 맡겨져 거기서 경제적 지원을 얻었지만, 그 뒤로는 행방을 알 수가 없다. 루이 16세 부부가 처형된 후 물주가 사라지면서 금전적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시설에서 내보내졌으며 부랑아가 되어 거리에서 굶어 죽었다는 설도 있고, 혁명 정부에 협력해 새로 미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1796년 병사했다는 설도 있다. * 궁전 하녀의 딸 에르네스틴 랑브리케(Ernestine Lambriquet)(1778~1813, 1788년 입양): 파리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나폴레옹 시대에 사망했다. 자세한 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문서 참조. * 엄마를 잃은 시종의 딸 조이(Zoe)(1790년 입양): 본명은 잔 루이즈 빅투아르. 위로는 [[수녀원]]에 입회한 두 언니가 있었고, 본인도 혁명 중에 수녀원에 입회하여 [[수녀]]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